나는 첫 아이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3주 가까이 범일동 일신 산부인과에서 원적외선과 염증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들은 심각한 얼굴로 패혈증 운운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패형증이 뭔지도 몰랐고 당연히 의사 선생님들이 고쳐 주겠지 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고열에 시달렸고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 그때 친정 모친(오남순 루씨아)이 병원에 오셨다. 저를 보더니 대뜸 “안 된다, 집에 가자, 내가 고쳐줄게” 그래서 택시를 타고 송정 바닷가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심히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일터로 갔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오래된 기왓장을 구워 이불에 둘둘 말아서 나를 앉혔다. 어머니는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한 시간쯤 되었을까? 피가 삭는지 지글지글 하면서 시원한 느낌이 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커다란 양재기에 명태 미역국에 밥을 말아 주셨다. 다 먹어야 빨리 낫는다며 다 먹으라 했다. 나는 맛있게 미역국을 다 먹었다. 오후에 어머니는 한 번 더 기왓장을 구워서 앉아 있으라 했고 나는 거짓말처럼 다 나앗고 아기를 편한 자세로 안을 수 있었다. 신기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 의사 선생님은 산모도 아기도 다 위험하다며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며 퇴원을 시켰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소달구지에 며칠 못 갈 거라는 아기와 산모를 싣고 집으로 돌아 오셨다, 외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돌봤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도록 어머니는 혼수상태였다. 손녀인 나는 빨리 숨 떨어지라고 3일간을 엎어 놓았다고 한다. 숨도 안 떨어진 것을 갖다 버리려니 너무 야멸차다 싶었던지 외할머니는 삼일 째 되자 이모한테 아기를 안고 나와 뒷산에 갖다 놓으라고 하셨다. 뒷산에는 범들이 밤마다 울어 대었다고 한다. 삼일이 되어 이모가 나를 안고 나가려는 데 어머니가 의식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이모에게 사정하였다. 아기를 내려놓으라고. 이모는 나를 어머니에게 안겨주었고 젖이 말라버린 어머니는 나를 젖 대신 보리 미음 쌀미음으로 키우셨다. 그리고 보리 뜨물에 소금을 타서 나를 씻기셨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안 죽은 것은 외할머니가 나를 빨리 죽으라고 엎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내 몸속의 나쁜 기운과 독한 것들을 다 토해낸 덕분에 나는 살아났던 것이다. 나는 장이 나빠 자주 설사를 했다. 나를 진찰한 메리놀 병원 선생님은 미국에서 수입한 약(비오티스?)이라며 이 약을 10년간 처방해 주셨다. 나는 의심 없이 그 약을 먹었다. 그런데 장은 더 나빠졌고 셋째를 낳고는 설사가 멈추지를 않았고 미음도 한 숟갈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는 장이 더 이상 회복 될 수가 없다고 했다. 남편이 수술이라도 해달라고 사정하자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바로 이웃집 순이 어머니가 나를 초량에 있는 유림 한의원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유림 선생님은 진맥을 하더니 약 여섯 첩을 지어 주셨다. 풀뿌리라 그런지 가격도 쌌다. 세 첩을 달여 먹었더니 신기하게 설사가 멈추었고 미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첩을 마저 달여 먹었지만 장은 더 나아지지 않았고 조금만 이상한 것을 먹으면 설사에 시달렸다. 조심 또 조심하며 살았다. 몸은 비쩍 말라 비틀어졌고 감기는 늘 내 몸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런 몸으로 세 아이를 키워야 했다. 살찐 사람 보면 살 한번 쪄 봤으면 소원했다. 나의 친정 아버지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쌀장사를 했는데 그 때는 쌀이 매우 귀했다고 한다. 6.25 동란 이후라 쌀을 배급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밀고를 당해 쌀을 다 뺏기고 고문을 당해 거적에 말려 버려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이모는 수소문을 하여 아버지를 찾아내었고 아버지는 겨우 숨만 안 떨어졌지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와 이모는 깨 세 가마를 다려서 드시게 했고 똥 소주로 고치셨다고 했다. 그 외에도 아버지는 지네를 태워 갈아서 탁주에 타서 마시곤 하셨다. 1990년 경 나는 정주영 현대그릅 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가는 모습을 TV에서 보곤 너무도 감동했다. 나는 그런 정주영이 대통령이 되면 통일도 되겠거니 하고 그가 창당한 국민당과 대선에 출마한 그를 조금 도왔다. 그와 악수했는데 손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막내 아들 정몽준과 악수했을 때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주영은 타고난 체력가였다. 나는 그 바람에 탄압을 받았다. 정치검찰들이 나를 납치하였고 내가 순순히 굴복하지 않자 구둣발로 나의 급소를 찼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떳을 때 나는 컴컴한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기절을 했는데도 검찰은 나를 죽으라고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다. 그 때는 나 하나 없애 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 였다. 노 태우 군사독재 시대였으니까. 정치 검찰은 더 미쳐 날뛰었다. 김기춘이 영도 복국집에서 우리가 남이가 하고 지역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자국이 몰려왔고 나는 이때다 하고 어둠을 틈타 달아났다. 아픈 몸으로 얼마나 달아났던지 발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죄 없이 정치 검찰에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다. 내개는 사전구속영장이 세 번이나 발부되었고 어디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나는 멀리 멀리 달아나야 했다. 세 아이를 두고 달아나는 어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머리가 빠개지듯 아팠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병원에 들렀다. 며칠이라도 누워 있으면 싶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나를 입원시켜주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내가 병원에 들리면 즉각 검찰에 신고하라고 해서 입원을 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무 아파서 거리에 쓰러진 채 몇 시간씩 정신을 잃었고 병세는 더 심해졌다. 기면증 비슷한 증세가 계속되었다. 8개월 후 수배가 풀려 집에 돌아온 나는 병을 고치기 위해 금침까지 맞았지만 증세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일주일째 일어날 수가 없었고 한의원에서 좋다는 약을 지어 먹었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외삼촌이 가르쳐 준 대로 어성초와 몇 가지 약초를 끓여 먹고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너무 놀라웠다. 그때서야 나는 각성이 되었다. 바로 이거야. 이렇게 쉽게 병이 고쳐 쳐진다고? 그때부터 나는 미친 사람처럼 이 길을 걸어왔다. 자연의학! 멀고 먼 길을 27년 째 걸어가고 있다. 길을 가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보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의학의 세 갈래길, 동양의학 서양의학 자연의학 중 내가 스스로 갈 수 있는 길은 자연의학뿐이다. 모든 의학은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고 자연의학 또한 그러하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평생을 꿈꾸었지만 소원을 이루지는 못했다. 지금도 울컥 하고 소설을 그리워 할 때가 있다. 한참 그 길로 달려가고 있는데 병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 성공은 못했지만 한권의 창작집과 3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미완성인 채 머물러 있는 소설이 있다. 창작집, 술 담그는 여자와 장편 묵시의 신, 아담과 이브의 범죄 이후, 해 뜨는 집, 그리고 잠자는 소설이 있다. 자연의 본성에서 멀어지면 몸에 병이 온다고 한다. 인체에는 100조 개의 세포가 있다고 한다. 이 세포가 필요로 하는 효소는 몸 자체에서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부족하다고 한다. 때문에 부족한 만큼 외부에서 채워 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우리 몸에 필요로 하는 효소를 공급해 주어야 우리 몸은 스스로 치유되는 것이라 한다. 효소는 생명의 불꽃이라 한다. 이 불꽃이 꺼지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맑고 푸르른 하늘, 오염되지 않은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와 풀 들, 오염되지 않은 강과 바다에서 맘껏 유영하는 물고기들, 우리들의 생명을 이루는 먹거리가 오염으로부터 위협받지 않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나는 매일 아프다. 그리고 매일 회복된다. 그것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정치 검찰의 구둣발에 채어 만신창이가 된 몸, 아직도 나는 다 낫지 않았다. 너무 몸이 힘 들 때 그 상처가 증상이 되살아 나 나를 괴롭힌다. 그러니 더 열심히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현재 솔아원에서 연구 개발 중인 제품들 당뇨, 신장질환, 고지혈, 고혈압, 변비, 비만, 간기능 개선, 심혈관질환이 있는 분들을 위한 약밥개발/ 비문증과 시력개선을 위한 눈 세척제/ 감기 편도선 비염에 좋은 코 세척제/ 아토피, 여드름, 지루성 피부염/피부 미백, 잔주름, 기미, 검버섯에 좋은 화장품/ 관절염, 테니스, 골프 엘보 등에 좋은 팩/무공해 용기 이들 제품 중 몇 가지는 완성되었습니다만 나머지는 미완성인 채 두고 가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생초로 잘 온 것 같습니다.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더니 이곳에 또 한 분의 스승님이 계셨습니다. 조선의 참의원 유이태 선생님이십니다. 한번 뵌 적도 없지만 저를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준 선생님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라는 가공된 인물이 아닌 진짜 이곳 생초면 신연리에서 태어나 평민들의 병을 고쳐준 신의, 심의로 불려진 유이태 선생님이십니다. 유이태 선생님은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질병 없는 세상을 열고자 일생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과 친소, 빈부와 민관을 차별하지 않고 환자만을 치료했다고 하십니다. 말년에 임금 숙종의 부름을 두 번 받아 어의가 되셨고 조선 최초로 홍역을 치료하셨다고 합니다. 유이태 선생님은 어릴 때 병을 앓았는데 혼자서 의서를 읽고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부모를 모시는데 의학을 알아야 한다며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여 3년만에 의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청년기에는 인근마을, 산음, 거창, 함양, 단성, 합천, 대구, 진주, 의령, 창원, 남원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셨다고 합니다. 산청 생초면에 조선의 명의 유이태 선생님 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유이태 스승님을 뵙고자 하는 분은 유이태 선생 기념관을 검색하면 됩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